베토벤: "레오노레" op. 72
베토벤: "피델리오" op. 72의 초기 작품명
판본
오페라 "피델리오"는 3가지 다른 판본이 존재합니다. 또한 4가지 다른 서곡이 이 한 오페라를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 만큼 베토벤으로서는 힘들게 완성한 작품으로 베토벤 스스로 그 어떤 곡 보다 산고가 큰 작품이었으므로 "Child of sorrow (슬픈 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첫번째 판본의 리브레토는 Joseph Ferdinand von Sonnleithner (그는 빈 궁정 극장의 비서로 일했다고 합니다)가 원작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완성했는데 지금 즐겨 연주되는 "피델리오"가 2막인 것과는 달리 3막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대본에 기초하여 베토벤은 작곡을 1805년 여름에 완성했지만 검열 문제로 1805년 11월 20일에야 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이 이루어집니다. 당시는 초연이 있고 2주가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쳐들어 오게되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빈의 음악 애호가들은 이미 빈을 떠나 피난한 상황이었기에 오페라는 3번만 공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극장 측에서 정한 작품명은 "Fidelio oder die eheliche Liebe (피델리오 혹은 결혼한 사랑)"이었는데 베토벤은 피델리오라는 말 대신에 원작과 같이 "레오노레 Leonore"라고 부르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이 때 쓰인 서곡은 비록 2번으로 이름 부쳐졌지만 가장 먼저 작곡된 것으로 레오노레 서곡 2번이 그것입니다.
이듬해 1806년 봄에 베토벤은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몇가지 노래들을 잘라내서 전체를 2막으로 만들게 됩니다. 바로 2번째 판본이 되는데 이 때 2막짜리 리브레토는 Stephan von Breuning이 작성합니다. 베토벤은 이 새로운 판본을 위해 새 서곡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레오노레 서곡 3번 op. 72a입니다. 이 작품은 역시 Theater an der Wien에서 1806년 3월 29일 초연됩니다. 당시의 작품명은 "Leonore oder der Triumph der ehelichen Liebe (레오노레 혹은 결혼한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번째 초연은 첫번째 보다도 더 못한 흥행으로 낳게 되고 베토벤은 극장 매니저와 말다툼까지 하게 되서 2번 공연된 뒤에는 무대에서 내려버리게 됩니다.
1807년 프라하에서 다시 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 베토벤은 이를 위해 또 다시 새로운 서곡을 쓰게 되는데 레오노레 서곡 1번이 그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래동안 네가지 서곡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라하에서의 상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후 1814년이 되어서야 베토벤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개작하게 되는데 외부 청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 스스로 원했던 것이며 당시 마지막 대본은 Georg Friedrich Treitschke가 맡았습니다. 결국 "피델리오"의 리브레토는 3명에 의해 완성되게 된 셈이죠. 이번에는 빈에 있는 Kärntnerortheater에서 초연됩니다. 그래서 오페라 "피델리오"의 공식 초연 장소는 Kärntnerortheater이 되며 초연일은 1814년 5월 23일입니다. 이 때 베토벤은 몇가지 노래를 삭제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 부분은 1막의 처음 등장하는 노래 2곡의 순서를 바꾸어서 야코비노와 마르첼리나의 듀엣으로 오페라를 시작하게 변경합니다. 오페라의 시작이 달라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서곡을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네가지 서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된 피델리오 서곡이 됩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새로운 서곡의 작곡을 초연일까지 마치지 못해서 3일 뒤인 5월 26일 두번째 공연에서부터 피델리오 서곡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베토벤도 이 작품을 "레오노레" 대신 "피델리오"로 부르는 것에 찬성하여서 정식 오페라의 작품명도 간단히 "Fidelio"로 공연됩니다.
베토벤은 마지막 판본을 마치고는 "피델리오"는 앞선 판본들과 혼동되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곡도 처음에 완성된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절반 이상이 새로 작곡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