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델리오" o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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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리오'는 극중 레오노레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장하여 개명한 가명.

Fidelity가 충실함, 지조 등을 뜻하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충실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순실이가 아니라.

역사

베토벤은 기악 작품으로는 9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 4중주,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로 대표되는 걸작들을 남겼습니다만 오페라 분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습니다만 작곡가 자신이 맘에 꼭 드는 대본을 많이 찾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대혁명 (1789-1799)이 있었던 직후로 베토벤은 독재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자유주의 정신에 큰 공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흔히 많은 오페라가 즐겨 다루는 통속적인 주제보다는 당시의 프랑스 혁명으로 상징되는 자유, 평등, 박애주의적인 메세지를 담을 수 있는 오페라를 원했다고 합니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이러한 베토벤의 의도를 충실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정치적 메세지를 담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원작이된 연극 대본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Tours 지방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유명한 정치단체인 Jacobin Club의 한 회원이 감옥에 갇히자 그의 아내가 직접 남자로 변장하여 남편을 구출한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피델리오 (Fidelio)"라는 말은 극 중 아내가 남자로 변장했을 때 사용한 이름으로 그 이름 자체에 '지조있는 남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영어로 Fidelity가 충실하다는 뜻이 있듯이 배우자에게 충실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1803년 Theater an der Wien (오스트리아 빈 시내에 위치한 '빈에 있는 극장'이란 이름의 극장)의 음악감독인 Emanuel Schikaneder의 청탁으로 처음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해 4월 시도한 오페라는 Schikaneder의 리브레토인 "Vestas Feuer"이지만 진행속도가 느려서 그해말까지 2개의 노래만 작곡하는데 그쳐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이에 다른 작품을 물색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피델리오"로 발전합니다. 역시 Theater an der Wien의 감독중 하나인 Peter von Braun에 의해 청탁됐습니다. 원작자는 케루비니의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Les deux Journees"의 리브레토를 맡았던 Jean-Nicolas Bouilly입니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그의 연극 대본 "Leonore, ou L'amour conjugal (레오노레 혹은 결혼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를 오페라용 대본 (리브레토)로 만든 것입니다. 이 연극은 이미 1798년 부터 Pierre Gaveaux에 의해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판본

오페라 "피델리오"는 3가지 다른 판본이 존재합니다. 또한 4가지 다른 서곡이 이 한 오페라를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 만큼 베토벤으로서는 힘들게 완성한 작품으로 베토벤 스스로 그 어떤 곡 보다 산고가 큰 작품이었으므로 "Child of sorrow (슬픈 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첫번째 판본의 리브레토는 Joseph Ferdinand von Sonnleithner (그는 빈 궁정 극장의 비서로 일했다고 합니다)가 원작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완성했는데 지금 즐겨 연주되는 "피델리오"가 2막인 것과는 달리 3막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대본에 기초하여 베토벤은 작곡을 1805년 여름에 완성했지만 검열 문제로 1805년 11월 20일에야 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이 이루어집니다. 당시는 초연이 있고 2주가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쳐들어 오게되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빈의 음악 애호가들은 이미 빈을 떠나 피난한 상황이었기에 오페라는 3번만 공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극장 측에서 정한 작품명은 "Fidelio oder die eheliche Liebe (피델리오 혹은 결혼한 사랑)"이었는데 베토벤은 피델리오라는 말 대신에 원작과 같이 "레오노레 Leonore"라고 부르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이 때 쓰인 서곡은 비록 2번으로 이름 부쳐졌지만 가장 먼저 작곡된 것으로 레오노레 서곡 2번이 그것입니다.

이듬해 1806년 봄에 베토벤은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몇가지 노래들을 잘라내서 전체를 2막으로 만들게 됩니다. 바로 2번째 판본이 되는데 이 때 2막짜리 리브레토는 Stephan von Breuning이 작성합니다. 베토벤은 이 새로운 판본을 위해 새 서곡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레오노레 서곡 3번 op. 72a입니다. 이 작품은 역시 Theater an der Wien에서 1806년 3월 29일 초연됩니다. 당시의 작품명은 "Leonore oder der Triumph der ehelichen Liebe (레오노레 혹은 결혼한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번째 초연은 첫번째 보다도 더 못한 흥행으로 낳게 되고 베토벤은 극장 매니저와 말다툼까지 하게 되서 2번 공연된 뒤에는 무대에서 내려버리게 됩니다.

1807년 프라하에서 다시 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 베토벤은 이를 위해 또 다시 새로운 서곡을 쓰게 되는데 레오노레 서곡 1번이 그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래동안 네가지 서곡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라하에서의 상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후 1814년이 되어서야 베토벤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개작하게 되는데 외부 청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 스스로 원했던 것이며 당시 마지막 대본은 Georg Friedrich Treitschke가 맡았습니다. 결국 "피델리오"의 리브레토는 3명에 의해 완성되게 된 셈이죠. 이번에는 빈에 있는 Kärntnerortheater에서 초연됩니다. 그래서 오페라 "피델리오"의 공식 초연 장소는 Kärntnerortheater이 되며 초연일은 1814년 5월 23일입니다. 이 때 베토벤은 몇가지 노래를 삭제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 부분은 1막의 처음 등장하는 노래 2곡의 순서를 바꾸어서 야코비노와 마르첼리나의 듀엣으로 오페라를 시작하게 변경합니다. 오페라의 시작이 달라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서곡을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네가지 서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된 피델리오 서곡이 됩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새로운 서곡의 작곡을 초연일까지 마치지 못해서 3일 뒤인 5월 26일 두번째 공연에서부터 피델리오 서곡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베토벤도 이 작품을 "레오노레" 대신 "피델리오"로 부르는 것에 찬성하여서 정식 오페라의 작품명도 간단히 "Fidelio"로 공연됩니다.

베토벤은 마지막 판본을 마치고는 "피델리오"는 앞선 판본들과 혼동되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곡도 처음에 완성된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절반 이상이 새로 작곡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연주 관습

베토벤 사후에 이 "피델리오"를 연주하는데 새로운 관습이 생겼습니다. 1841년 Otto Nicolai는 레오노레 서곡 3번을 2막 시작 직전에 연주했으며, 1849년에 Carl Anschütz라는 사람은 2막의 마지막 장면 사이에 넣어 연주했는데 1904년에 말러는 이 전통을 따랐다고 합니다. Gottfried Wagner (Bonn 1977년)나 Jurij Ljubinov (Stuttgart 1986년)은 레오노레 서곡 3번을 오페라가 끝난 다음 연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많은 공연이나 음반들이 최종 판본인 "피델리오"를 연주하고 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는 몇몇 음악가들에 의해 1805년 베토벤이 처음 작곡한 "레오노레"가 연주되기도 합니다.[1] [2]

한글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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