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시작하는 일련의 악극들을 작곡하기 이전 젊은 시절의 바그너는 3편의 유명 오페라를 작곡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29세)", "탄호이저 (32세)", "로엔그린 (35세)"이 그것이다. "탄호이저"는 그 중에서 가장 선율적으로 풍부한 작품으로 바그너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하게 들리는 음악을 많이 담고 있다.
초연과 판본
"탄호이저" 작곡의 최초의 계획은 1842년 5월에 파리에서 독일로 돌아온 직후였으며 최종적으로 스코어가 완성된 것은 1845년 4월 13일 이었다. 이것은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는데 후에 바그너 자신에 의해서 몇 군데가 변경되었다. 오늘날의 종막 형태는 1847년 8월 1일 드레스덴 상연 때 새로 고쳐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변경은 1861년 파리 상연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제1막 시초의 베누스베르크 장면에 당시 파리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발레 장면을 삽입한 것이다. 원래 이 부분은 아주 짧은 것이었는데 파리 청중들을 의식한 극장 지배인이 발레를 삽입할 것을 요구하여 몇 번의 의견충돌 끝에 새로 이 부분을 확대하여 발레곡으로 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에서 발레가 많이 (그것도 주로 2막에) 포함되었던 이유는 상류사회의 오페라 예약자들이었던 소위 '조끼 클럽' 때문이었다.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던 그들은 공연시간을 무시하고 오페라의 1막이 끝날 때쯤에야 비로소 극장에 도착하여 2막의 발레를 구경하며 자신들만의 사치스런 쇼를 즐겼다고 한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1막 베누스 성(城)의 장면을 좀더 관능적이고 화려하게 하는 효과로 발레를 삽입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어쨌든, 파리공연 이후로는 발레곡이 없는 드레스덴판과 발레를 넣은 파리판의 두 가지가 공연되고 있는데, 드레스덴 판이 양식적으로 더 통일되어 있고 바그너 악극의 이상에 더욱 충실하지만, 파리 판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종종 상연되고 있다. 현재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는 파리 판과 드레스덴 판을 혼용한 것을 사용한다. 화려한 볼거리와 웅장한 바그너 고유의 음향을 제공할 수 있는 파리판의 장점과 가사전달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드레스덴 판의 장점을 모두 취합하여 그때 그때의 공연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악기 편성
피콜로 1(2), 플루트 2(4), 오보 2(4), 클라리넷 2(6), 파곳 2(6), 혼 4(12), 트럼펫3(12), 트롬본 3(4), 튜바 1, 팀파니 1, 트라이앵글 1(1), 심벌즈 1(1), 탬버린 1(1), 하프 1(1), 현합주, 잉그리시 혼(1) (주: 괄호 안의 숫자는 무대 위에서의 악기편성을 나타냄.)
줄거리
때와 장소: 13세기 초,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 (Wartburg)
등장인물: 헤르만, 튀링겐의 영주 엘리자베트, 영주의 조카딸 탄호이저, 음유시인 볼프람 폰 에션바흐, 음유시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음유시인 하인리히 데어 슈라이버, 음유시인 비테롤프, 음유시인 라인마르 폰 츠베터, 음유시인 베누스, 사랑의 여신 비너스 목동, 4명의 시동
1막
- 1, 2장 베누스베르크 (베누스의 성)의 동굴
탄호이저는 미의 여신 베누스와 오랜 애욕을 나날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녀를 떠나고 싶어 한다. 탄호이저는 성적인 쾌락도 좋지만 베누스베르크에 가득한 장미빛 향기를 떠나 고향의 자연을 느끼고 싶어한다. 탄호이저는 쾌락만으로 가득찬 삶이 지겨우니 변화와 자유를 갈망하노라고 하자 베누스는 그에게 실망하며 베누스성을 떠나더라도 다시 내게 돌아오게될 거라 한다. 탄호이저는 이에 결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고 베누스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경고한다. 결국 탄호이저는 회개와 속죄로 안식을 얻고자 한다고 하며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 있소'라고 외치게 되고 베누스의 성은 사라져 버린다.
- 3장 바르투부르크 성 근처의 골짜기
탄호이저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된 자신을 발견한다. 목동이 지나가며 아름다운 5월을 찬양하고, 종교적인 죄를 씯고자 로마로 구원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무리가 지나가고 목동은 그들의 안부를 빌고 탄호이저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 4장
영주가 기사들과 사냥에서 돌아오던차 탄호이저를 발견하고는 그의 이름 (하인리히)을 부른다. 탄호이저는 오만하게 그 고장을 떠났던 차라 다시 돌아온 그가 친구로서 온 것인지 적으로서 온 것인지 모두들 묻는다. 탄호이저의 친구 볼프람은 그의 표정으로 보아 오만하지 않다며 그를 환영하자 모두들 같이 환영한다. 영주는 그가 그렇게 오래 어디에 있었는지 묻자 탄호이저는 그저 멀고 먼 나라를 헤매었다고 답하고 영주와 음유시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라려 한다. 이 때 볼프람이 '엘리자베트를 위해 머무르시오'라고 하자 그는 기뻐하며 멈춘다. 이에 볼프람은 탄호이저의 노래에 정숙한 엘리자베트가 매혹되었으나 그가 오만하게 떠나갔을 때 그녀도 노래를 멀리하게 됐노라 설명한다. 음유시인의 축제에 엘리자베트가 다시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탄호이저는 격렬히 기뻐하며 사람들과 화해하며 엘리자베트에게 데려가 달라고 외친다. 기사들은 탄호이저에게서 오만함을 내쫗은 고귀한 힘을 찬양한다.
2막
- 1장 바르투부르크 노래의 전당
탄호이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다시 노래의 전당을 찾은 엘리자베트는 사랑하는 전당에게 인사를 보낸다.
- 2장
볼프람의 소개로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와 재회한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돌아와서 감사하노라고 하고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탄호이저는 신비스럽게 높은 기적이었노라 답한다. 이에 그녀는 그 기적을 찬양하고 그가 떠난 후 잃어버린 기쁨에 대해 얘기하며 둘은 기뻐한다. 엘리자베트를 몰래 흠모하고 있던 볼프람은 이를 지켜보며 자신의 희망이 사라졌노라 탄식한다.
- 3장
영주가 노래의 전당으로 들어와서 다시 그 곳을 찾은 조카딸 엘리자베트를 반긴다. 영주는 엘리자베트의 속 마음을 털어놓기를 권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수줍어한다. 영주는 노래경연의 시작을 선포한다.
- 4장
기사들과 귀족, 부인과 시종 등이 입장하며 영주를 찬양한다. 영주는 탄호이저를 환영하는 축제를 마련했으며 그를 우리 옆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무엇인지 그의 노래에서 밝혀내보자고 한다. 그러며 사랑의 본질을 밝힐 수 있겠느냐고 하며 그것을 밝혀내어 가장 멋있게 노래한 사람이 엘리자베트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 4명의 시동이 음유시인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를 엘리자베트에 건내자 그녀는 하나를 펴서 시동에게 돌려준다. 시동이 볼프람의 이름을 불러서 볼프람부터 노래하기 시작한다.
볼프람은 사랑의 샘을 불결하게 더럽히지 않고 싶다고 하자 청중들은 그의 노래를 높이 사지만 탄호이저만 갑자기 일어나 자신은 입술로 샘물을 맛볼 것이며 그래야 샘이 마르지 않노라며 자신이 정말로 사랑의 본질을 안다고 노래한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의 노래에 끌려 찬동하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하므로 부끄러운 듯 물러선다.
이제 발터가 갈증으로 목타하는 탄호이저는 그 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며 입술이 아닌 마음이 통해야 하노라고 노래한다. 청중들의 찬동에도 탄호이저는 거칠게 발터를 비판한다. 탄호이저는 마음이 아니라 육신의 향락에서 사랑을 찾노라고 노래하자 청중들은 크게 동요한다. 이에 비테롤프가 탄호이저를 패륜아로 부르며 나서자 기사들이 칼을 빼어들며 이에 찬동한다. 탄호이저는 허풍장이, 잔인한 늑대로 비테롤프를 비유하며 싸울 가치가 없노라고 한다. 기사들은 흥분하지만 영주는 이를 말리고 다시 볼프람이 나서서 하느님과 사랑의 고귀함을 노래하자 탄호이저는 극도의 황홀경에 빠져 베누스 사랑의 여신을 찬양하며 그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분들은 베누스의 성으로 떠나라고 노래한다. 이에 모두들 탄호이저가 과거에 있었던 곳이 베누스베르크임을 알고 경악하며 귀부인들은 떠나간다.
영주, 음유시인들, 남은 기사들은 지옥의 환락에 빠졌던 탄호이저를 저주하며 그를 재판하고 추방하자며 칼을 빼든다. 이 때 엘리자베트는 앞을 가로막으며 탄호이저를 보호하려 한다. 사람들은 엘리자베트를 배반한 탄호이저의 목숨을 왜 구해주냐고 묻는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의 구원이 그녀에게 소중하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에게는 이미 저주가 내렸으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한다. 엘리자베트는 여러분이 그를 심판할 수는 없노라고 하며 그에게 참회의 길을 떠나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사람들은 엘리자베트의 천사같은 말에 감동한다.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가 그를 구하는 천사임을 모르고 그녀에게도 육욕의 시선을 보냈던 것을 부끄러워한다. 결국 영주는 죄인 탄호이저를 추방하며 로마로 참회를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을 따라 떠나도록 명령한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기도하고 탄호이저는 이토록 나를 지켜주는 천사 (엘리자베트) 덕에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며 천사는 나를 위해 제물이 되었노라고 하며 엘리자베트의 가운 자락에 입을 맞추고 '로마로'라고 외치며 순례자들을 따라 급히 떠난다.
3막
- 1장 바르투부르크 성 근처의 골짜기
때는 가을. 날이 저물어가는 시각. 성모상 앞에 엘리자베트는 기도하고 있고 볼프람이 숲에서 내려오다 그녀를 보고 멈춘다. 멀리서 순례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엘리자베트는 그들이 돌아왔노라며 기뻐하며 순례자들의 무리에서 탄호이저를 찾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슬퍼한다. 순례자들은 사라지고 엘리자베트는 성모마리아에게 기도한다. 탄호이저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대신 그녀의 목숨을 거둬들여 그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내용이다. 볼프람이 지친 엘리자베트를 위로하려 다가서자 그녀는 이를 사양하고 사라진다.
- 2장
엘리자베트를 사모하는 볼프람은 저녁별에 인사하며 노래부른다. 그녀가 천국으로 가서 축복받는 천사가 되소서라는 말을 저녁별이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 3장
이제 완전한 밤이 되었다. 남루한 순례가의 망토를 입고 창백한 얼굴에 수척한 탄호이저가 등장. 지팡이를 짚고 힘없이 걸어온다. 볼프람은 그를 발견하지만 죄를 씯지 못한 채 감히 다시 돌아왔느냐고 묻는다. 탄호이저는 이 고장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베누스베르크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볼프람은 경악하며 로마에 가지 않았냐고 묻자 탄호이저는 로마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괴로워한다.
이를 볼프람이 불쌍히 여겨 동정하자 탄호이저는 볼프람이 자신의 적이 아님을 알고 자신이 로마에서 겪은 얘기를 해준다. 다른 참회자들이 대지의 푸른 초원을 지날 때 자신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찾아 걸었으며 그들이 샘가에서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릴 때 자신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마셨노라며 고통속에 참회하며 로마에 도착했고 결국 교황을 만나게 됐노라고 한다. 그 앞에서 머리를 땅에 조아려 가슴을 치며 죄를 고백했더니 교황은 '당신은 영원히 저주 받았노라! 내 손에 들고 있는 이 지팡이에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의 뜨거운 불에서 구원받을 수 없노라'고 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베누스에게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한다. 볼프람이 말렸지만 탄호이저가 열렬히 베누스를 찾자 정말로 베누스가 등장하여 탄호이저를 부른다. 지옥의 쾌락에 몸을 맡기려는 탄호이저를 잡아 당기며 볼프람은 한 단어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며 당신은 아직 구원받을 수 있다고 외친다. 그것은 바로 '엘리자베트'라고 볼프람이 외치자 탄호이저는 우뚝 멈춰선다.
내가 졌다면서 베누스는 사라지고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장례행렬이 열린 관을 메고 서서히 다가 온다. 장례행렬은 엘리자베스와 그녀가 간구한 죄인에게도 축복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른다. 볼프람의 지시로 관이 내려지고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굽어보고 천천히 쓰러진다. 탄호이저는 '거룩한 엘리자베트, 나를 위해 기도해주오!'라 외치고 죽는다.
이제 날이 밝아 젊은 순례자들이 도착한다. 한복판에 새로 파란 싹이 돋은 지팡이를 가진 순례자가 있다. 그들은 신의 기적을 찬양한다.
해설
오페라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명성을 전 유럽에 확고부동하게 만든 걸작이다. 이 작품은 그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몇가지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을 탈피하려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전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도 여전히 사용했던 번호 형식의 아리아 배열 (한곡 한곡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며 배열순서에 따라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 형식)을 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항이다.
둘째로 바그너는 이후의 그의 작품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탄호이저"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바그너는 음악, 특히 주인공의 독창이 중심이었던 과거의 오페라의 전통을 뛰어넘어 음악과 연극, 무대연출 등이 모두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각 장면마다의 음악이 서로의 시작과 끝이 잘 구분되지 않고 시종일관 끊어짐 없이 계속 연결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무대위의 연극내용이 음악 때문에 단락별로 끊어지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통일되도록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무한선율'이라고 불리우는 작곡기법이다. 이러한 무한선율의 진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라이트모티브 (시도동기)'가 필요하게 된다.
"탄호이저"에서는 이전까지의 작품들에 비해 등장인물의 개성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면모를 보여주는데, 주요 인물은 모두 특징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동력으로서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개성적인 캐릭터들은 바그너가 즐겨 소재로 사용한 '인간내면의 다양한 갈등'을 형상화하는데에 큰 효과를 얻기도 한다. 게다가, 바그너는 옛 전설을 악극의 소재로 삼기를 즐겨했는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탄호이저"에서부터는 단순한 전설의 인용에서 진일보하여 전설속의 주인공들에게 각각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내부의 심리묘사와 갈등구조를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이러한 구성은 이후의 작품에서 더욱 뚜렷해지는데, "로엔그린"이나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 등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옛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영과 육, 그리고 성스러움과 세속의 갈등, 권력을 향한 욕망과 암투, 사랑, 배신, 저주와 구원 등의 복잡한 사상들이 덧입혀저서 완전히 새로운 대본으로 재창조되었다. 놀라운 것은 바그너는 그의 악극의 대본을 거의 다 스스로 직접 썼다는 점인데, 이것은 그의 창조력이 음악뿐만이 아니라 문학, 연극, 시각예술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미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탄호이저"에 나타난 바그너의 종교관
바그너의 종교관은 그의 다른 주요작품들 특히 갖가지 신들이 등장하는 "니벨룽의 반지"를 염두해둔다면 전통적인 독일의 천주교 혹은 개신교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다분히 이교도적인 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말년에 쓰여진 "파르지팔"과 지금 얘기할 "탄호이저"의 주제는 상당히 그리스도교적이다.
오페라 "탄호이저"에서는 그리스도교 (보다 정확히는 천주교)적인 구원이 하나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의 오페라 중에서도 비교적 친숙해지기 쉬운 이 작품의 음악과는 달리 이러한 소재는 "탄호이저"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인기를 얻기에 조금은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천주교적인 전통이 한국의 유교적인 전통만큼이나 뿌리 깊은 중유럽의 문화를 이해한다면 비그리스도교인라 하더라도 작품을 즐기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탄호이저"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말해 속세의 기준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방탕했던 탄호이저가 그를 사랑한 엘리자베트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구원된다는 이야기이다. 둘은 결국 죽게 되지만 내세에서 모두 구원받게 됐음이 썩은 지팡이에서 푸른 싹이 돋는 기적으로 암시된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받았다고 보는 개신교와는 달리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행해야' 사후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천주교는 서로 구원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이 오페라는 천주교적인 종교관에 바탕을 하고 있기에 큰 죄를 지은 탄호이저의 구원이 간단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일 것이다. 흡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가 씻기었다고 보는 것과 같이 본 오페라에서는 순결한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 대신 죽음으로써 탄호이저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탄호이저"의 핵심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바그너는 특히 뒷부분의 기적이나 죽음에 대한 부분은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 있어서 이야기의 흐름에 약간의 도약이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대신 작곡가는 그의 후대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다시 한번 다루게 되는 노래경연이라는 형식을 이 오페라에 이미 도입하고 있다 - 오페라 "탄호이저"의 정식 이름은 "탄호이저와 바르트부르크의 노래경연"이다.
노래경연에서는 음유시인들은 순결한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방탕한 나날들을 보낸 바 있는 바그너는 근본적으로 성욕에서 출발한 육체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이러한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라고 하는 화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대표되는 바그너가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이후 작품들 특히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등장하는 요소들을 모두 합축하고 있는 모태와도 같은 작품이다. 3막의 흐름이 지나치게 함축적인 것도 한 작품에 너무 많은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그너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주제와 '천주교적인 구원'이라는 주제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을까? "파르지팔"에서는 다분히 후자이며 "트리스탄"에선 완전히 전자이겠지만 이 "탄호이저"는 두 주제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어있다.
방탕한 탄호이저도 여인의 사랑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줄거리는 바로 바그너의 종교관, 가치관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그너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인 도덕기준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사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자기모순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그의 '구원관'에서 비롯됐다고 추리할 수 있지 않을까? 바그너가 코지마 (유부남 바그너가 결혼한 25세 연하의 유부녀, 리스트의 딸, 바그너 추종자이자 지휘자 폰 뷜로의 아내)의 사랑으로부터 종교적으로 구원받았을까하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과 작품은 속세에서 불멸로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